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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

라니에리 감독 경질, 과연 타당한 결정인가


라니에리 감독 경질, 과연 타당한 결정인가


간밤에 해외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소식이 업데이트 됐다. 토트넘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겐트와의 유로파 리그 32강전에서 무기력한 경기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손흥민은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고 에이스 델레 알리는 축구화 스터드로 상대 선수 정강이를 강하게 가격하며 레드 카드를 받았다. 누리꾼들이 '쓰레기'라며 델레 알리에게 손가락질한 게 당연할 정도로 그의 플레이는 비매너에 가까웠다.  

하지만 해외축구 이슈는 다른 곳으로 집중됐다. 비슷한 시각 프리미어 리그의 디펜딩 챔피언 레스터 시티가 중대 발표를 전한 탓이다. 그 소식은 바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다른 우승 후보들에 비해 강하지 않은 데다가 얇기까지 한 선수층을 갖춘 레스터 시티의 2016/2017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21세기 축구판 신데렐라 스토리였다. 팀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이기도, 라니에리 감독의 부임 첫 해에 이룬 성과이기도, 현대 축구판에서 굳어진 우승의 문법을 깬 기록이기도해서 그 의미는 더욱 남달랐다. 이와 함께 라니에리 감독은 '2016년 FIFA 올해의 감독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구단의 공식 발표와 함께 이 모든 결과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016 FIFA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라니에리 감독


경질의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작년 리그 우승의 공은 인정하나, 현 목표인 리그 잔류를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라는 것이다. 올 시즌 레스터 시티의 성적이 처참한 건 맞는 말이다. 리그 25경기를 치룬 지금까지 거둔 성적은 고작 5승 6무 14패. 리그 18위 헐 시티 보다 승점 1점 앞선 17위. 경기 내용, 스탯, 결과, 순위까지 레스터 시티의 모든 지표는 영락 없는 하위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경질설은 서서히 순위가 떨어지던 겨울 초입부터 솔솔 피어났다. 그때까지는 '경질에 대한 고민은 이해하나 아직은 시기상조다'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라니에리 감독은 챔스 16강 진출로 구단의 믿음에 대해 보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비야 FC 홈에서 열린 챔피언스 리그 1차전이 2:1로 끝나자 결국 레스터 시티의 보드진은 칼을 뽑아들었다. 

라니에리 감독의 경질에는 의문이 남는다. 보드진이 성적을 이유로 결단을 내릴만큼 떳떳했는가하는 것이다.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목을 받은 건 그들의 얇은 선수층에서 비롯됐다. 우승의 1등 공신이었던 제이미 바디, 리야드 마레즈, 은골로 캉테 모두 '스타 플레이어'라는 이야기를 듣던 선수들은 아니었고, 그 뒤를 받치던 로베르트 후트, 크리스티안 푸후스, 다니엘 드링크워터, 카스퍼 슈마이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빼어난 개인 기량보다 탄탄한 조직력과 확실 공격 1 옵션으로 차근차근 리그를 점령한 게 지난 시즌의 레스터였다. 그리고 이런 뚜렷한 팀 컬러를 만든 건 라니에리 감독의 공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레스터 시티는 우승 직후 '선수 유출'이라는 또 다른 위기를 마주해야 했다. 핵심 3인방인 바디, 마레즈, 캉테 모두 아스날, 첼시 등의 구애를 받았고, 실제로 캉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로 이적했다. 그 외에도 미드필드의 엔진 역할을 하던 드링크워터, 올브라이튼이 이적설에 휩싸였고 골키퍼 슈마이켈 또한 에버튼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인적 유출은 선수층 뿐만 아니라 구단 내 핵심 직원들에게도 일어났다. 인사 담당자인 스티브 월쉬가 에버튼의 풋볼 디렉터로 이적한 것이다. 스티브 월쉬는 EPL 내 최고의 스카우터로 평가 받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 스카우트로 일을 시작한 첼시에서 지안프랑코 졸라, 디디에 드록바 등의 발굴과 영입을 맡았으며, 지난 시즌 레스터 시티 주전 선수들은 슈마이켈을 제외하고는 모두 월시가 레스터에 합류한 이후 영입된 선수들이었다.


레스터 유니폼을 입은 미드필더 낭팔리 망디


레스터 시티는 지난 여름 이적시장 아메드 무사, 낭팔리 망디, 이슬람 슬리마니 등 수준급의 자원을 수급하며 빈자리를 메꾸려고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들은 부상을 입거나 리그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등 경기력을 끌어올리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올브라이튼과 드링크워터는 간간히 부상에 시달렸다. 마땅한 보강이 이뤄지지 않은 수비진 또한 중앙 수비수인 후트와 모건의 노쇠화가 진행되며 급격히 무너졌다. 

겨울 이적 시장을 통해 무너지는 곳을 메꿀 필요가 있었으나, 레스터 시티는 1996년생 윌프레드 은디디와 몰라 와규를 영입하는 데 그쳤다. 윌프레드 은디디는 96년생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통할 즉시 전력감이라고 보기 어렵고, 몰라 와규 역시 우디네세의 로테이션급 멤버라 전력을 올려준 선수는 아니다. 레스터는 여름과 겨울 이적시장을 통틀어 무려 9명을 영입했다. 겉보기에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선수층을 보강한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양측면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리그 17위라는 거대한 빚으로 돌아왔다.


에버튼 유니폼과 함께 미소 짓는 스티브 월시 풋볼 디렉터


현재 축구의 이적시장은 단순히 감독 또는 스카우트의 책임 하에 돌아가지 않는다. 감독과 스카우트, 보드진의 긴밀한 협의 하에 이뤄진다. 스카우트가 선수 리스트를 뽑으면, 감독과 보드진이 함께 돌아보고 회의하며 확실한 후보를 정하고, 보드진이 상대 구단 또는 에이전트와 이적을 협상한다. 한푼 두푼이 아닌 100억 이상의 거대한 금액이 순식간에 오가는 판인 탓이다. 이 과정에서 보드진이 무능하면 바가지를 쓰거나 선수 영입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물론, 기존 선수를 지키는 것도 어렵고, 유능한 직원의 유출 또한 막기 어렵다. 보드진은 리그를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영입에 큰 권한을 지녔던 스티브 월쉬를 에버튼에 쉽게 내줬다. 이후 진행한 선수 영입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변방 리그의 선수도 100억 이상 금액을 주고 데려올만큼 협상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따. 올 시즌 성적이 곤두박질 친 이유를 단순한 전술과 선수 영입 실패로 돌려야 한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라니에리 감독과 보드진이 함께 짊어져야 한다. 

더군다나 레스터 시티는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 다시 우승권을 노리는 팀이 아니었다. 리그 생존 또는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며 최대한 순위를 거두고 리그 중위권 정도를 유지하는 게 목표였다. 도움을 적당히 줄 법한 선수만 9명이나 영입했다는 건 이 목표에 보드진도 동의했다는 의미다. 그 이상을 바라보는 팀이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수를 영입했어야 옳다. 라니에리의 잘못은 선수들의 기량을 확실하게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 이미 간파된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올 시즌에도 매 경기 변함 없이 되풀이 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이 무능한 감독의 나태한 판단이었는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택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현 레스터 시티의 상황에서 감독이 택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라니에리 감독은 레스터 시티가 지닌 기량을 200% 이상 발휘해냈던 탓에 경질이라는 덫에 걸린 걸지도 모르겠다. 



라니에리 감독의 후임은 누가 맡게 될까. 현지에서는 로베르토 만치니와 앨런 파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만치니는 다양한 우승 경험이 있지만 빅클럽밖에 맡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고, 앨런 파듀는 꾸준히 팀을 말아먹길 반복하는 국밥 감독이다. 라니에리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 있는 감독은 어디에 있을까. 현 분위기를 수습하고 프리미어 리그 잔류, 나아가 내년 시즌 좋은 성적을 끌어낼 수 있는 감독은 어디에 있을까. 경질 소식이 전해진 뒤 영국 현지의 리오 퍼디난드, 마이클 오언 등 다수의 선수 출신들이 경질 결정을 비판하는 의견을 개진했고, 게리 리네커 역시 SNS에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 

과연 레스터 시티의 결정은 타당한 결정일까? 칼 끝이 무딜지 무디지 않을지는 끝까지 베어봐야 알겠지만, 분위기 전환용으로 꺼내든 칼이라면 어쩌면 부작용이 더 클지도 모른다. 어쨌든 칼은 뽑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리그가 끝나갈 무렵 결과가 이야기해줄 것이다.